돌이켜보니 갭이어

회사 일이 없어지니 졸릴 때 자고, 눈이 떠지면 일어나고 또 배가 고프면 무언가 마시고 먹어도 됐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낮의 한적한 카페에서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고, 쇼파에 앉아 다리를 편 채로 아무 때나 책을 꺼내 보고, 드라마를 보면 하루가 금방 갔다. 일렉트로닉 기타에 입문했고 피아노를 쳤다. 이게 바로 한량의 생활이란 말인가. 여름과 가을이 금방 지나갔다.

생산하지 않고 소비하며 보내는 생활을 여러 달 지내다 보니 당연하게도 통장 잔고가 기울기가 가팔라져 갔다. 우아함을 잃지 않고 나 자신을 잘 먹이고 재우기 위해서는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스프레드시트를 만들고 먼저 연락해 주거나 연이 닿은 회사들과 커피챗을 했다.

디지털노마드로 살며 일할 수 있는 좋은 오퍼를 받기도 했으나, 뭔가 다시 열심히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없는 상태로 일터로 돌아가면 안 되겠다 싶었다. 이도저도 아닌 마음을 갖고 조인하고 싶지않았다. 거절을 하면서도 이게 맞는 건가? 몇 번을 고민했는지 모른다. 여러모로 나를 위해 채용 담당자를 비롯해 많은 분들께서 마음을 써주셨는데, 일이 주는 성취보다 중요한 뭔가가 있다는 질문이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고, 그게 뭔지 알고 싶었다.

국면 전환이 필요할 때쯤에, 국경이 막 열린 태국으로 떠났다. 따뜻한 곳에 있으니 웅크려져 있던 마음이 햇볕에 마르는 듯 했다. 낮에는 수영을 하고, 선베드에 비스듬히 누워 해가 지는 걸 하염없이 바라봤다. 건들건들 걷다 보면 해가 졌다. 코로나로 못 만났던 친구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요즘 관심사는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디가서 뭐하고 놀지에 관해서 치열하게 토론했다. 원래 계획은 한 열흘 머물다 오는 거였는데, 빨리 돌아갈 이유도 없고 해서 있다보니까… 한 달이 지나 있었다. 평화로웠다.

쉬다보니 한 가지 명확해진 게 있다. 나는 일로써 나의 쓸모를 증명하며 살아온 그간의 삶을 피곤하고 고단하다 여기지만 사랑한다. 유유자적한 삶을 지향하지만, 치열한 삶에 대한 열망이 있다. 푸켓에서 싱가포르를 거쳐 돌아오는 밤 비행기에서, 뭔진 몰라도 스스로를 믿고 삶에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를 계속 찾아나가는 실험을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허나 동시에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면서 무엇이 중요한지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바쁘다는 이유로, 찾으려고 하지 않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는 않고 싶지 않다. 이 약속을 지킬 수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Koh Maphrao에서 Laem Hin Pier로 가는 페리 안에서 본 바다


영화같은 데서 보면, 갑자기 주인공들이 갭 이어를 가지곤 하던데… 갭 이어라는 게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내겐 방의 벽지 무늬를 하염없이 보고,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고 흘러가는 구름을 멍하니 바라보며 순간 순간에 집중하는 시간이 갭 이어였다.

잠시 하던 걸 멈췄더니,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보이기 시작했다.